눈으로 볼 수 없는 것
2023/05/14
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것. 앞을 보고 있어도 볼 수 없는 것. 눈을 뜨고 보지만 무엇인지 모르는 것. 결국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. 볼 수 없기 때문에 모르는 것.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도 알 수 없는 것. 결국 알 수 없는 것. 본다는 건 무언가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 수 있다. 비단 예술뿐만 아니라 삶의 구석구석에서. 눈은 경험의 시작이다. 보고 느끼고 깨닫고 행동한다. 그렇기 때문에 강력하다. 보는 건 강력한 것. 눈을 통한 충격은 무딘 손톱에 살점이 떨어질만큼의 물리적 고통을 주기도 하고, 스스로 호흡하는 게 불가능한 한 생명과 이별하는 그 특정한 순간을 반복하며 가슴에 구멍을 내기도 한다. 하지만 보는 것만으론 어디에도 개입할 수 없다. 고통에 무뎌지면 현실을 볼 수 없다. 현실을 보지 못하는 고통은 결국 무언가를 훼손하는 결과를 낳는다. 생명의 존엄을, 다른 종을, 타인을, 나 스스로를 모독하는 것.
보는 것에 날이 서있어야 한다. 예민해야 하고 온 감각을 곤두세워야 한다. 시각예술이 -예술 앞에 시각- 인 이유. 손에 꼽는 감각 중 시각인 이유. 시각이란 감각이 가진 힘, 권력, 영향력. 무뎌지는 걸 경계하는 의무. 예술가/창작자의 직업적 윤리의식과 책임감. 결국 나에게 좋은 에술은 무언가 훼손하지 않는 예술이고, 창작자 자신을, 타인을, 생명과 죽음의 존엄을 지킨 어떤 이미지이다.